* bgm : Anan Ryoko, conversation






 늦은 오후의 청소시간. 온 학교가 시끌시끌한데, 형식은 어째 청소는 않고 북적대는 매점 한 켠에서 신나는 간식시간이다. 소시지빵을 하나를 입에 문 모양이 점심때 먹은 급식과 후식은 이미 소화가 끝난지 옛날인 것 같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을 우물거리던 형식이 포장을 뜯느라 손에 묻은 케첩을 교복에 슥슥 문질러 닦고는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든다. 



「크리스마스에 뭐해? 너네집 놀러가도 돼?   07:48」

「임샨: 알바   13:27」

「엑.. 빨간날인데??ㅠㅠㅠㅠ   13:27」   1

「그럼 12월 31일에는??   13:27」   1



 시완은 아침 수업 시작 전에 보낸 메시지에 점심시간이 다 끝날 때 쯤에야 답장을 하더니, 형식이 거기에 칼같이 보낸 답은 읽지도 않고 또 바로 자나보다. 형식이 근 한 달을 지켜본 결과, 시완은 사는게 고단해서 많이 자는게 아니라 그냥도 잠이 많았다. 어쩌다 아르바이트 휴무였던 날에도 수업시간은 어김없이 임시완의 수면시간이었으니까. 또 한번 잠들면 얼마나 깊게 잠드는지, 추워서 깼었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나 싶을 정도로 곤히 잔다. 진짜 누가 업어가도 모를거다. 칫, 잠탱이. 빵부스러기가 묻은 입술을 비죽인 형식은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저를 놀리는 것 같아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꺼버렸다.



 형식이 시완의 옥탑방에 다녀온 후로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시완이 교과서를 배게 삼고 형식은 민우와 동준을 팔걸이 삼는 일상적인 풍경은 여전했고, 기말고사를 끝낸 사내 녀석들이 본격적인 수험생 신분이 되기 직전의 마지막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쑥덕이느라 교실은 어수선했다. 그래서인지 숨은그림찾기처럼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할만큼 작은 차이를 알아 챈 눈치 빠른 녀석은 없었다. 예를 들어 교실 뒷문이 꼬박꼬박 닫혀있다든지, 쉬는시간마다 교실을 채우던 셋의 목소리 크기가 딱 절반으로 줄었다든지 하는. 그리고 엎드린 시완의 어깨에 가끔 형식의 점퍼가 덮여있거나 하는. 그런, 미묘한 차이를.






너라는 꽃이 피던 계절

- 열여덟, 겨울. 세번째.


w. 비지






 핸드폰을 쥔 주먹을 마이 주머니에 꽂아넣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형식이 발을 동동 굴렀다. 히터가 없는 매점은 북극, 점퍼가 없는 저는 털깎인 북극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얼굴을 오만상 찌푸려 보지만, 민우와 동준은 오들오들 떨고있는 친구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교실로 돌아갈 기미가 없다.



"싸나이라면 썅썅바지!"

"그라췌! 아이고 우리 함누씨 발음도 찰지셔!"

"김똥주니! 역시 너뿐이라니까!"



 형식은 아이스크림 하나에 잔뜩 흥이 난 제 친구들을 보며 혀를 찼다. 미친놈들. 평소엔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이럴 때만 친구래. 추워서 턱이 떨리는구만 얼어죽을 아이스크림에다, 그것도 쌍쌍바로 고른 센스 하고는. 통째도로 모자란 걸 반 찢어서 누구 코에 붙이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형식이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민우와 동준은 손에 스틱 하나씩을 들고 요란을 떤다. 오, 사, 삼! 이! 일! 얼씨구. 카운트다운까지.



"..."

"헐..."

"...존말로 할때 형한테 그거 넘기자 똥준아?"

"미쳤냐? 형은 무슨 형이래! 너 내가 존나 빠른년생이라고 무시하냐?" 



 반으로 잘라먹으라고 나온 저놈의 아이스크림은 세상의 부조리함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싶은건지, 항상 한 쪽이 크게 갈라진다. 다른 사람들이 먹을 땐 어떤지 몰라도, 일단 민우와 동준이 고른 쌍쌍바는 항상 그랬다. 그리고 누가 어느 쪽을 잡았든지 간에, 결국에 큰 걸 차지하는 건 민우였다. 독한 새끼. 김동준은 백날이 가도 저 까탈스런 욕쟁이를 한번을 못 이길 거야. 그러니까 그냥 넘겨주고 갔으면 좋겠는데. 형식은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본격적으로 티격대기 시작한 두 녀석을 말릴 타이밍만 기다린다.



"야 삼강오륜 모르냐, 삼강오륜? 장유유서! 붕우유신! 모르냐고!"

"붕우유신? 그딴 게 여기서 왜 나와? 뷰우웅신아!"



 어휴.. 도저히 유치해서 오늘은 길게 못 기다려주겠다.



"나 먼저 간다. 마저 싸워라."

"에이씨, 야 먹어라 먹어. 같이 가, 형식아!"

"아 바켱식 잠바는 또 어디 갖다버리고 똥개새끼같이 발발 떠는데!"



 얘네 분명히 내가 중간에 끊어줄 줄 알고 저러는거야. 피곤한 새끼들. 제 양 쪽에 쪼르르 달려와 서는 녀석들의 어깨에 자연스레 팔을 걸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형식이었다.



-



 그새 화해한 동준과 민우는 쪼끄만 놈 둘이서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앞서 걷고, 그 뒤를 따르던 형식은 또 핸드폰을 꺼냈다. 시완에게 뭐라고 말을 더 덧붙여야하지 않을까 싶어서. 일 없으면 나랑 놀ㅈ.. 아니지 아니지. 술 한잔 할ㄹ... 아냐 이것도 아닌거 같애.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자꾸 썼다 지웠다 하는 형식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힌다. 수업에 이렇게 집중을 했다면 전교1등을 해도 몇번을 했을 거다. 도대체 뭐라고 해야 얼빠진 놈처럼 안보일까, 액정만 골똘히 보며 휘적휘적 걷는 긴 다리에 뭔가 퍽, 채인다. 



"아 뭐야."

"고개 좀 들고 다니지, 박형식."

"어 시완아! 일어났네? 어디가?"

"소각장."



 발에 채인 것이 마주 오던 쓰레기봉투인 것을 보고 찌푸렸던 인상은 시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배시시 풀어졌다. 평소엔 어디로 숨는지 청소하는 임시완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어쩐 일로 소각장까지 간단다. 신기하다. 형식은 시완의 조금 부은 눈이며 붕 뜬 앞머리를 이쪽 저쪽으로 살피며 킥킥댔다. 물론 시완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가던 길을 갈 뿐이었지만. 



 안 무거워? 같이 들어줄까? 형식이 어느새 가던 방향을 틀어 시완의 곁을 졸졸 쫓는다. 저보다 한뼘은 작은 시완의 눈높이를 맞추겠다고 어깨를 구부정히 하고는 옆으로 게걸음을 걷는 모양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린다. 아니다, 그냥 내가 들까? 그런 형식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앞만 보고 걷던 시완이 결국 발을 멈췄다.



 교실 가라. 어? 왜? 안춥냐, 니 점퍼 의자에 걸쳐놨어. 하, 하나도 안츱그든.. 31일에 휴무야. 어어..? 그날 알바 쉰다고. 감기 걸려서 오면 문 안열어준다. 어, 어어! 나 옷 입으러 간다! 추워서 가는거 아니다! 진짜야!



 후다닥 교실로 돌아가는 형식의 뒷모습을 보는 시완의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샌다.






* * *






 결혼한 지 몇 년째인데 아직도 서로 죽고 못사는 형식의 부모님이 데이트를 하러 나간 크리스마스. 형식이 간만의 혼자된 자유에 기뻐한 것도 잠시, 크리스마스고 뭐고 우리에겐 그저 빨간날일 뿐이라며 동준과 민우가 쳐들어왔다. 왜 얘네한테 집이 비었다고 말해줬을까. 머리를 쥐어 뜯으며 후회하는 사이 민우는 오자마자 게임기부터 붙들었고, 김동준은 제 집인양 냉장고를 뒤져서 사과며 귤같은 과일부터 꺼내와 민우 옆에 앉았다. 



"하민우 이것 좀 먹고해."

"아 나 안먹어. 살쪄." 

"넌 좀 쪄야 돼. 뼈 밖에 없어서 할 때 자꾸-"

"아씹! 미친새끼야, 아가리 단속 안해?!"



 동준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파드득 짜증을 낸 민우가 형식의 눈치를 살핀다. 민우에게는 다행히도 형식은 혼자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 눈은 벽걸이 달력의 맨 끝의 끝, 빨간색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12월 31일에 고정이다. 아, 임시완한테 크리스마스 선물 주고싶다. 그날 주면 새해선물이 되나? 아무튼. 뭐하지? 담요? 담요로 할까. 솔직히 점퍼 계속 벗어주긴 추워... 민우에게 핀잔을 먹은 동준이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 실실 웃는 형식을 보다 혀를 끌끌 찬다. 점퍼도 팔아먹고 다니더니 정신은 또 어디 빼먹었냐. 나사 제대로 풀렸네.



"동준아, 새해선물로는 보통 뭐하냐?"

"신년선물? 우리집엔 식용유나 스팸세트 들어오던데."

"씨바, 선물 딱 깠는데 식용유면 존나 빡치지 않냐?"



 아 하민우, 제발 좀.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안끝내면 말이 안나오냐? 근데 나도 식용유세트는 별로야. 못 먹잖아. 동준의 혀차는 소리에 시선을 당겨온 형식이 뜬금없이 던진 질문은 역시나 영 영양가 있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형식은 실없는 대답과 함께 낄낄거리는 동준을 향해 고개를 휘휘 젓는다. 아니 그런 선물 말고.  



"응? 그런 선물이 아니면?"

"...됐다, 별거 아니야."

"와 바켱식 미친아, 말하다 말기 있기없기? 뭔데, 좋아하는 사람 생겼냐?"

"오 바켱시익- 웬일이야! 누군데? 누구야?"



 형식은 재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당황해 눈알을 굴렸다. 아우 이런 눈치만 더럽게 빠른 새끼들. 부서져라 두드리던 조이패드는 내던지고 소파 밑에서 눈을 빛내는 게, 이대로 입을 다물어버리면 한대 맞을 것 같다. 김동준 돌주먹에 맞기는 싫으니까 대강 힌트만 줘야겠다. 반은 맞았지만, 반은..



"아니야 진짜."

"야야, 누구든지 간에 존나 땡겨. 땡기면 넘어오게 돼 있어. 알지?"

"그거 해 그거! 어디서 타는 냄새 안나요? 내 마음이.. 타고있잖아요.."

"김덩준씨 아주 쳐돌으셨어요? 언제적 타는 냄새야, 존나 할배냄새 나게."



 니가 그러니까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한 거 아냐, 병신같이. 한껏 아련한 표정으로 멍청한 소리를 하는 김동준과 그걸 또 걸고 넘어지는 하민우. 누가 초딩들 아니랄까봐 형식을 향한 민우와 동준의 집중력은 1분도 채 발휘하지 못하고 또 투닥대기 시작한다. 뭐, 딱히 말해줄 것도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이 편이 더 낫겠다. 형식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까놓은 귤 하나를 입에 물며 뒤로 기대어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임시완에게 필요한 게 뭘까. 담요나 방석 같은 거 말고.



 누가 그랬던가. 비밀을 공유하면 친해진다고. 지금 형식은 그 말을 한 사람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완을 집까지 업어다 주고 다음날 또 다시 그 집으로 찾아갔던, 그 때 이후로 벌써 한달 가까이 훌쩍 흘러 해가 바뀌려 하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둘 사이에 있는 거라곤 그 아무 짝에 쓸모 없는 비밀뿐인거다. 그 한 달은 저가 처음 시완에게 가졌던 관심이 싹을 틔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그 싹이 말라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싶다.



 물론, 형식이 일방적으로 묻고 시완이 단답으로 대답하는 것이지만, 메시지도 주고받고. 가끔, 엄마가 시완에게 주려고 해놓은 건 아니지만, 밑반찬을 갖다주기도 하고.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올 해의 마지막 날 시완의 집에서 함께 놀기로 약속도 했고. 시완이 저의 이름도 모른채 옥탑방의 문을 열어줬던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지만, 형식은 뜀박질을 하려는 발목에 타이어라도 묶어놓은 것 마냥 마음에 조급증이 일어 답답하기만 하다. 



 뭘 주어야 따뜻해할까. 엎드려 잘 때 말고, 깨어있을 때도.



 형식은 막연한 불안함에 마음을 졸이던 자신을 떠올렸다. 열린 뒷문으로 들어온 찬 바람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저를 빤히 바라보던 임시완. 별 없는 밤하늘마냥 무미건조한 까만 눈동자는 버석한 공허함으로 가득하고, 깜빡이는 눈꺼풀에 맞춰 오르내리는 긴 속눈썹에는 진득한 피로만이 묻어있었다. 그 모습이 퍽 위태롭게 느껴져, 느리게 감겼다 뜨이기를 반복하는 눈꺼풀이 영원히 눈동자를 감춰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이제와서 보니 시완은 은근히 다부진 구석이 있어,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였던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시완의 눈동자 깊은 곳 어딘가는 여전히 추워보여서. 왜 그렇게 추운건지, 제가 뭔가 해줄 수 있는게 없는지. 자꾸만 신경쓰게 된다. 게다가, 뒤이어 이런 제 마음은 무엇인지도 헷갈려 머릿속이 금새 엉키고 마는거다.



"야 김똥! 제대로 안따라올래? 아 씨발 오라고 좀!"

"아 있어봐봐! 게임에서라도 암컷 좀 꼬셔보게!"



 동준과 민우가 또 서로 있는대로 소리를 치며 투닥대는 소리에 눈을 들었다. TV 속 게임 화면엔 털이 보송한 강아지 두마리가 쫑쫑거리며 돌아다니는데, 조작하는 두 놈은 칙칙하고 걸걸하고, 아주 시끄러워 죽겠다. 내 저 것들 때문에 진지하게 사색이란 걸 할 수가 없어요. 형식은 혀를 쯧, 차며 귤 껍질을 깐다. 임시완은 귤 좋아하려나. 옥탑방 갈 때 귤도 사가야겠다, 생각하는 형식의 손 끝이 노랗다.






* * *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때빼고 광내고, 옷을 열 댓번은 입었다 벗었다, 머리에 왁스를 발랐다가 마구 뭉개고는 다시 감고. 왜이렇게 부산을 떠냐며 엄마에게 등짝을 한대 맞고도 헤실헤실, 형식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머리가 잘 만져지면 옷이 이상한 것 같고, 옷이 괜찮다 싶으면 신발이랑 안맞고. 한참을 거울 앞에서 패션쇼를 벌이다, 결국은 점심때 쯤에야 집을 나섰다. 형식은 한 손에는 귤 봉지, 다른 손엔 선물이 든 쇼핑백, 등에는 아끼는 만화책을 한가득 쓸어담은 백팩을 메고, 신발 앞코를 톡톡, 바닥에 두어번 구르며 기분좋게 현관을 열었다.



 분명히 겨울인데, 봄날같다. 옥탑방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던 형식은 생각했다. 간만에 햇살도 좋지만, 무엇보다 지금 제 자신이 너무 더웠기 때문에. 낑낑 거리면서 한 삼천개쯤 되는 것 같은 계단을 오르고 나니, 예쁘게 쓰고 나왔던 스냅백은 어느새 쇼핑백에 들어있고 이마와 목덜미는 땀에 흠뻑 젖었다. 모자에 맞춰 까만색으로 챙겨입은 스테디움 점퍼는 왜 이렇게 두툼한지, 야무지게 잠궈놓은 똑딱이 단추를 죄다 풀어헤치고 나니 조금 살 것 같다. 임시완 얘 은근 체력이 좋은거 아닐까? 어떻게 이 길을 매일 오르내리지? 헉헉대며 실없는 생각을 하던 형식이 시완네 집 평상에 앉아 땀을 식히고는 어느새 확 끼쳐드는 추위에 부르르 떨며 몸을 일으켰다.



똑똑.



"나왔어."



 초인종이 없는 단칸방의 현관문을 콩콩, 두드려보지만, 어쩐 일인지 대답이 없다.



"임시완, 집에 없어?"



 목소리를 조금 높여도.



"시완아아아, 뭐해애."



 기일게 늘여봐도. 불투명유리 너머는 인기척도 없이 조용하다. 얘가 사람을 불러놓고 어디를 갔나. 전화를 걸었더니 안에서 벨소리는 울리는데 전화는 또 받지를 않는다. 이건 집에 있다는건지 없다는건지. 형식은 시완을 애처롭게 부르며 쫓겨난 큰 개 마냥 끙끙거렸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아님 얘가 나를 놀리나? 아니면 나랑 놀기 싫어서 도망을 갔다거나.. 설마 나 혼자 설레발 친 건가?! 이리 저리 뻗어나간 생각은 튀고 튀어 애시당초 시완이 저를 초대한 적이 없는건 아닐까 하는 데까지 미친다. 형식은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끼익, 지금 뭐한 거냐고 놀리기라도 하듯이, 너무 쉽게 문이 열린다. 으엉. 뭐야? 뭐지?



"형식이 들어갑니다아.."



 일단 문이 열리긴 열렸으니. 형식은 얼빠진 얼굴을 한 채 습관적처럼 소근소근 인사까지 하고 집으로 들어간다. 문을 살그머니 닫는데, 커튼을 쳐놓아 어스름한 방 안에서 쌕쌕, 작지만 고른 숨소리가 들려온다. 시완아? 자? 제멋대로 둘둘 말려 봉긋하게 솟은 이불을 향해 시완의 이름을 부르자 우웅, 잠꼬대 비슷한 대답이 돌아온다. 시완에게 이불을 온 몸에 둥둥 감고 자는 험한 버릇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형식은 어찌나 배를 잡고 웃었는지 모른다. 그림같이 반듯하게만 잘 것처럼 생겨서는 은근히 헐렁한 구석이 있다니까. 저 이불더미 밑에서 숨은 안막히나. 선물 꾸러미만 임시로 한쪽 벽에 세워두고, 이불을 끌어내려 곱게 덮어준다. 잘 자네, 임시완.



 형식은 외투와 가방을 행거에 걸고, 귤은 채반에 담아 앉은뱅이 밥상 위에 올려 두고 조심스레 시완의 곁에 앉았다. 제 집 같았으면 들어오자마자 정리정돈이고 뭐고, 전부 사방팔방 내던졌을텐데. 엄마가 보면 집에서도 좀 그러라고 혼내겠다. 푸흐. 평소 깔끔한 성격은 아닌 형식도 시완의 집에서는 왜인지 조심조심하게 된다. 남고생 혼자 사는 집인데도 워낙 깨끗해야 말이지. 알바하고 들어오면 피곤할텐데 청소는 또 언제 다 하는지 방바닥에 먼지 한 톨 없다. 형식은 손으로 바닥을 한번 쓸고는 이제는 도롱도롱 코까지 살짝 고는 시완의 얼굴으로 눈길을 옮겼다. 자기전에 샤워도 했나보다. 확 풀어져 평소보다 훨씬 순해보이는 얼굴이 맨들맨들, 윤까지 난다. 이 집 화장실 엄청 춥던데. 외출 전후로 꼬박꼬박 샤워하는 것도 대단하다 싶다. 그래도 유난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 그리 깔끔을 떠는 게 참 임시완다워서 잘 어울린다. 하긴 이 곱상한 얼굴에 쉰내가 풀풀 나는 건 또 좀 아니지, 암.



 그렇게 이런저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시완의 얼굴만 구경하던 형식은 혹여나 잠을 깨울까, 살금살금 조용조용 한참을 혼자 노닥거렸다. 이 게임 저 게임 다 깔아서는 시완의 핸드폰으로 초대메시지를 보내고, 시완의 옆에 슬그머니 누워서 몰래 셀카도 찍어보고. 마음이 급해서 채 쓰지 못한 선물카드를 대신해서 포스트잇에 작은 편지도 써놓고. 이쪽으로 엎드렸다 저쪽으로 누웠다, 소리만 안낸다 뿐이지 쉴 새 없이 부스럭거리는 형식의 옆에서, 시완은 잘도 잔다.






* * *






"넌 앉아있어."

"이야아- 저녁밥 해주는거야?"

"어, 뭐. 오라고 해놓고 자버린 건 나니까."



 흠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싱크 앞에 등을 보이고 선 시완의 귓불이 발갛다. 형식은 해가 뉘엇뉘엇, 집 앞 하늘이 딱 저 귀만큼 붉게 물들 무렵에야 일어나 저를 보고 놀라던 토끼 같은 얼굴이 떠올라 부스스 웃었다. 귀여워.. 점심도 먹지 않았지만 어쩐지 허기지지 않아서 그냥 시완의 얼굴만 보고 있었는데, 꽤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임시완이 그런 표정 짓는 걸 또 어디가서 보겠어, 흐하흐.



"오늘의 추천 메뉴는 뭐죠, 임셰프님?"

"떡볶이..입니다. 흠."



 오오- 메뉴가 마음에 든건지, 기대않고 던진 장난을 시완이 받아준 것이 기쁜건지, 형식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환호성을 냈다. 한껏 흥이나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엉덩이가 들썩들썩 한다. 조금 망설이다 '입니다,' 고작 세글자를 덧붙인 거였지만 그래도 이게 웬일이야! 자는 거 안 깨우길 저어엉말 잘했다. 기특하다, 박형식!



"그럼 전 어묵 듬뿍 넣은 떡볶이로 주세요, 셰프."

"나 어묵 안먹어."

"난 떡 안먹어어- 어묵 많이 넣어줘!"



 에이, 바로 정색하는 것 봐. 어묵이 얼마나 맛있는데! 잠꾸러기가 입맛은 까다롭네 흥.. 떡볶이에서 떡을 먹지 않는 제 식성은 생각지도 않고 입을 비죽이는 형식이다. 양배추는? 시완은 궁시렁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커다란 양배추를 반으로 쪼개며 물었다. 장난하냐 당연히 팍팍 넣어야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다다다 튀어나온 대답에 시완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그건 똑같네."



 부드러운 시완의 말투에 형식이 흐흐, 자그만 윗니를 잔뜩 내보이며 바보같은 웃음을 지었다. 우리 둘이서 떡볶이 먹으면 딱 맞겠다, 그치. 막, 남는거 하나도 없고. 나는 국물까지 다 긁어먹거든. 흐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입은 쉴 새 없이 조잘조잘. 제 발목을 잡고 상체를 좌우로 흔들흔들, 고개를 까딱까딱 하는 모양이 기분 좋은 티를 숨기지 못한다. 그럼 치킨은 다리랑 날개 중에 뭐 먹어? 날개. 오- 나는 다리만 먹는데, 흐하. 제 등에 대고 실없는 질문을 하고 또 저 혼자 부스스 웃는 소리를 들으며 차분히 재료를 다듬는 시완의 앞에, 예쁘게 썰린 어묵이 차곡차곡 쌓인다.



-



"박형식, 아직 멀었어?"

"응?"



 시완이 제 앞에 흩어진 귤 껍질 조각들을 손날로 삭삭 쓸어모으며 형식에게 물었다. 배게를 끼고 엎드려 만화책을 보던 형식은 시완의 얼굴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옆에 쌓아놓은 만화책의 책등을 탁탁, 쳐서 줄을 가지런히 맞추는 시완의 양 볼이 조금, 아주 쪼오끔 뾰루퉁해 보인다. 어라라. 오늘 진짜 왜이러지, 임시완. 왜 이렇게 귀엽지?



 양배추가 떡과 어묵보다 많은 떡볶이를 말 그대로 바닥까지 긁어먹고 난 뒤, 형식이 백팩에서 만화책을 챠란! 하고 꺼냈을 때만 해도 시완의 표정은 영 시큰둥했다. 아니, 그냥 평소와 똑같았다고 하자. 야 이거 진짜 재밌어. 너 맨날 재미없는 책만 읽지 말고 이런 것도 읽어줘야 돼. 형식은 그런 걸 왜 보냐는 듯 멀뚱히 앉은 시완의 손에 1권을 반강제로 쥐어주고 저는 2권부터 보기 시작했더랬다. 그리고 지금, 시완이 다섯번째 편을 읽고 있는 저에게 얼른 내놓으라며 채근을 하는거다. 와.. 내가 어디 가서 만화읽는 속도로는 빠지는 사람이 아닌데. 몸이 고무처럼 늘어나는 만화책 주인공보다, 이 순간 만화책 한권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는 임시완이 더 신기하다. 



"너 아까는 안본다며?"

"아니, 뭐, 그런 말은 안했는데.."

"그렇게 보고싶어?"

"..."



 자, 여기. 나는 벌써 몇 번 본거라 딴거 보면 돼. 더 놀리면 삐치는 것도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오늘 신기한 구경은 이미 많이 한 것 같다. 더 보면 감당 안될 것 같애. 형식은 시완에게 만화책을 넘겨주고 몸을 아예 시완쪽으로 돌려 누웠다. 금새 표지를 펼쳐들고 집중하는 얼굴이 신선하다. 다른 재미없는 책 읽을 때랑 비슷하지만, 한번을 깜빡이지도 않고 도로록 구르기만 하는 눈동자가 꽤 신나 보인다면 제 착각일까.  



"야아.. 근데 너는 귤을.."



 시완의 표정을 한참 보다가 귤이나 하나 까먹을 요량으로 머리 맡에 손을 뻗었더니, 잘게 조각조각난 귤 껍질이 잔뜩 쌓여있다. 아이고. 어쩐지 귤 하나 입에 넣는데 한참을 꼬물거리더라니. 어린애가 까도 이것보다 잘 까겠다. 두 손 사이에서 귤을 돌돌 굴리는 형식의 입에서 결국 웃음이 터진다. 와, 진짜 얘 때문에 미치겠다.



"푸하학! 흐하.."



 그런 형식을 본 척도 않고 그림에 반짝이는 눈을 고정시킨 시완과 그 옆에서 배를 잡고 굴러대는 형식. 귤물이 든 두사람의 손가락 끝이, 똑같이 노랗다. 






* * *






"아참, 이거이거. 니꺼야."

"이게 뭔데?"

"어어? 아니, 뭐. 그냐앙."



 집에 있길래. 시완에게 쇼핑백을 건넨 형식은 차마 눈도 못마주치고, 괜스레 귤꼭지만 톡톡, 손톱 끝으로 튕겨낸다. 처음부터 주려고 마음 먹고는, 마트 이불코너에서 어느게 더 부드럽고 포근한지 수십번을 제 얼굴에 부벼가며 고르고 골랐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지나가던 아줌마들이 다 쳐다보고 수근거릴 때보다 지금이 백배는 더 부끄러운 것 같다.



"담요네?"

"어, 어. 너 학교에서, 그, 잘 때. 더, 덮으라고."



 조그만 손으로 포장을 풀어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다리가 달달 떨린다 싶더니 말도 똑바로 나오지를 않는다. 아이씨.. 왜이러냐, 박형식. 도통 자기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는 시완이라 어떤 취향인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최대한 심플한 걸로 고르긴 했는데 마음에 들어할런지. 또 차라리 아무 반응 없는것 보다는 싫어하는 티를 내주는 편이 더 나을 것도 같다. 형식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춰보려 손 안의 귤만 만지작거린다.



"....그래."

"어?"

"고맙다."

"아..."



 뜬금없는 단답이 돌아오기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시완의 손에는 담요 대신 노란 종이 한 장이 들려있다. 아까 시완이 잘 때, 편지 대신 써둔 쪽지다. 이렇게 코 앞에서 읽는 모습을 확인할 줄은 몰랐는데. 아, 더더욱 미치겠다. 펜을 놀리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데, 그 생각이 들었을 때 빼놓았어야 했다. 다시 시선을 떨구고 뒤통수를 긁적대는 형식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 사이 시완은 펼쳤던 것을 다시 곱게 개켰다. 서랍을 열고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시완의 눈길이 조심스레 거머쥔 쪽지에 가닿는다. 사진을 찍듯 천천히 깜빡이는 속눈썹이 파르르, 얕게 떨린다. 「작은 천조각이 마음까지 덮어줄 수는 없더라도. 곧 따뜻한 계절이 올거야.」 시완은 작게 긴 숨을 내쉬며 포스트잇을 조심스레 서랍 한쪽 벽에 붙였다.



 담요를 잘 정리해 넣고 서랍을 닫으며 일어나는 시완은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표정이다. 형식은 그런 시완을 올려다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무반응만은 아니길 바랬던 거 다 취소. 이 순간 시완의 성격이 무던한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동준이나 민우였다면 평생 놀림거리였을텐데! 물론 그 둘에게는 편지 한쪽도 써줄 일이 없었겠지만. 덕분에 민망함을 조금 걷어낸 형식이 다시 쾌활한 목소리를 낸다.



"야 시완아, 열두시 다 돼간다. 타종하는 거 봐야지!"

"응.. 그런데 뭘로?"



 허얼.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 말하던 형식의 입이 길게 벌어진다. 그러고 보니 이 옥탑방의 간소한 살림목록에 티비는 포함된 적도 없었겠구나. 형식이 한쪽 눈썹을 찌그러뜨리며 낭패로운 표정을 지었다. 으아, 생각도 못했어... 임시완이랑 제야의 종소리 듣고 싶었는데. 그까짓 종소리 안듣는다고 새해가 안오는 것도 아니지만, 형식은 왜인지 섭섭한 기분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루종일 티비 없는 것도 모르고 뭐했냐, 나 진짜 바본가.. 입을 삐죽 내밀고 궁시렁대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거. 뭐, 티비도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어? 오..어어?!"



 반쯤 실의에 빠진 형식을 가만히 보고있던 시완이 무언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시완의 손끝을 힐끔 바라본 형식의 눈이 크게 뜨였다. 우와아아아아!!! 형식이 시완의 핸드폰을 두손으로 받쳐들고는 금방이라도 어깨춤이라도 출 기세로 환호성을 내지른다. 박형식, 시간 다 됐어. 시완은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사운드에 한쪽 어깨를 움찔하고는 조용히 형식을 붙잡았다. 어어어, 그래그래. 나지막히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형식이 핸드폰 귀퉁이의 안테나를 뽑아내고 자리에 앉는다. 와, 대박. 진짜 못보는 줄 알았잖아. 작은 액정 가득 리포터와 구경꾼들의 얼굴이 잡히자 이내 호들갑을 가라앉히고 얌전해지는 형식이다.



"그게 이런 것도 되네."

"몰랐어? 스마트폰 들고다니면 뭐하냐아-"



 형식은 핀잔을 주며 시선을 조금 들다, 말을 채 맺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시완의 옆얼굴이 너무 가까이 와있다. 속눈썹이 몇가닥인지도 셀 수 있을 것 같다. 잔뜩 들뜨는 바람에 시완이 제 옆에 바싹 붙어 앉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형식이 몸이 뻣뻣하게 얼어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완은 처음 보는 기능이 신기해 입술을 모으고 오오- 감탄사를 낸다. 그 동그란 입모양이, 발간 색감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찬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바란다.



'..여러분 다같이 카운트다운 해주세요! 오, 사, 삼!..'



 첫키스를 하면 귓가에 종소리가 울린다던가. 시완의 통통한 입술을 감쳐문 지금 이 순간, 우습게도 형식에게는 진짜 종소리가 들려온다. 형식은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고, 시완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감싸올려 고개를 바로했다. 심장에서 누군가 마구 뜀박질을 하는지, 두근대는 소리도 너무 크게 느껴진다. 조금 떨리는 입술을 잠시 떼어냈다 다시금 가까이 다가가자 어깨를 살풋 움츠리며 눈을 꼬옥 감는 모양에, 아찔한 기분으로 저도 눈을 감았다. 



"..해피 뉴 이어."






* * *






 저질렀다. 큰일났다. 어떡하지. 방금까지 새하얗던 형식의 머릿속에 이제는 저 세문장만이 어지럽게 맴돈다. 노랗게 물든 손톱만 잘근잘근 씹어대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집에 가,가야겠다.."

"어? ..그래?"

"어.. 으응,"



 형식은 대답도 어영부영 하고, 바로 점퍼와 가방만 챙겨들고 신발을 꿰어신었다. 어색한 공기가 답답해 급하게 현관을 연다. 어서 도망이라도 치고싶은 제 마음과는 달리, 시완이 배웅해 주겠다며 부득불 따라 나섰다. 보나마나 또 외투도 안여미고 춥게 나섰을텐데, 뒤돌아 그걸 챙겨 줄 마음의 여유가 없다. 형식은 미간을 좁히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박형식, 같이 가."

"..."

"천천히 좀.."



 계단을 거의 뛰어내려오다시피 한 형식이 건물 밖으로 나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찬 공기에 코 끝이 찡해져,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던 눈동자가 조금 안정을 찾는 것도 같다. 하얀 한숨을 길게 뱉어내는 형식의 등 뒤로 시완이 멈춰섰다. 갈게. 추운데 멀리 나오지 마. 말을 멈추고 입술을 한번 짓이긴 형식이 금새 가라앉은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미안."



형식은 시작이 어딘지 끝이 어딘지 마구 뒤엉킨 생각, 그리고 왜인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가로등불만 어스름한 골목길의 어둠 속에 애써 감췄다. 터벅터벅, 골목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계단을 내려가는 형식의 발소리만이 울린다. 임시완은 왜 안 들어가고 가만히 있는거야. 추울텐데. 기어코 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들어가려는 건가 싶어, 형식이 조금 힘을 주어 걸으려던 찰나였다.



"뭐가 미안한데?"



 시완의 차분한 목소리에 형식이 우뚝, 멈춰선다. 작지만 또렷한 그 여섯 글자가 어떤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걸까. 어째 숨까지 잘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다. 고개를 숙여 발 끝을 바라본 형식이 빨갛게 언 손을 들어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혼란에 겨워 잔뜩 좁아져있던 미간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폐부를 죄어오던 호흡이 리듬을 되찾는다. 형식은 제 앞에 남은 한칸의 계단을 쏘아보다, 결국 천천히 뒤돌아섰다. 가파른 계단 위의 시완을 향한 시선이 곧바르다.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쉬고, 제 마음을 최대한 또렷하게 발음해 본다.



"내가, 널 좋아해."



멀리 도시의 소음과 찬 바람만이 둘 사이의 정적을 채운다. 



"생각보다 더 많이."



 채 가늠할 수 없던 마음의 크기가 고백의 말을 꺼내놓을수록 더 커지는 기분이 들어, 형식의 귓볼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가로등이 달린 전봇대를 등지고 선 시완의 표정은 잘 보이지가 않는다. 형식의 말에 움찔 한다거나 뭐라고 대답 하려는 기색도 없다.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린 입술과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꾹 말아쥔 주먹이 얕게 떨린다. 점점 더 길어지는 침묵에 마음의 심지는 빠르게 타들어간다. 고양이 앞에 선 쥐, 아니면 잘못을 저지르고 화난 엄마 앞에 선 어린애가 된 것 같다. 초조하다.



 그렇게 얼마나 마주보고 있었을까.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이 시완이 발을 뗐다. 타박타박.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온다. 매일 오르내리는 길일텐데 새삼 걸음마 떼는 아이처럼 조심스럽다. 시완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라 있을지, 차마 볼 용기가 나지 않아 형식의 눈이 질끈 감겼다. 타박타박, 발자국 소리가 더 큰지,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더 큰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다. 



"..형식아."



 얼핏 다정함이 섞인 부름에 눈을 뜨자 마주한 것은 언제나처럼 그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까만 눈동자. 한 칸 위의 계단에 서서 형식과 눈높이를 맞춘 시완의 얼굴이 불그레한 가로등 불빛에 물들어 있다. 흡.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당황한 형식이 호흡을 급하게 들이켰다. 방금 저의 모습이 바보같아 보이지 않았을까. 부끄러워진 형식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지려다, 달싹, 시완이 입술을 여는 모습이 눈에 걸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깜빡, 천천히 감았다 뜬 눈동자에 저의 얼굴이 가득 담겨있다. 살짝 웃음이 걸린 시완의 눈가가 조금 붉어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미안해 하지마."



 그 말에 눈썹을 팔자로 눕힌 형식이 곧이어 와락, 시완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입을 열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시완은 말없이 제 어깨에 고개를 묻는 형식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작게 속삭였다.





"내가 말했잖아. 고맙다고."






* * * * * 






게임은 도쿄정글, 만화책은 원피스. 아기자기하고 신나는 느낌을 내고 싶었다.


벚꽃을 보면서 봄편에선 애들 꽃구경 보내야지, 했는데 아직 겨울도 마무리를 못했다니! 이게 무슨일이야! 싶어서 메모장을 켰다.

그런데 벚꽃도 이미 다 졌네... 허허.. 뭐 꼭 글을 계절따라 써야하는 건 아니니까.. 쩝.

한달만에 쓴게 이모양 이꼴이라니, 혹시나 만에 하나 기다려주신 고마운 분이 있다면, 그 분께 너무너무 죄송스럽다.

봄편은 봄이 끝나기 전에 완성하는 걸 목표로;;